커다란 물탱크가 있던 집 I 이설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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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물탱크가 있던 집

 

서툰 방화범이 빠져나오지 못했다

의자 대신 탁자를 끌어당기며
겨울은 스스로 견딜만한 것
그 이상이 된다

*

터진 물집처럼 볕드는
한 다발 유년의 얼굴들 품고
액자는 창문 쪽으로 어깨를 기울인다
다정한 착각 속에서, 꽃받침 한 저마다의 텅 빈 환대 속에서
박제한 살풍경이 더는 내외하지 않는다
지금 커튼 밖을 서성이는 사람이
우리는 슬프지 않습니다

가스계량기 흰 눈금이 돌아오고
다락이 열리면 나는 톱날만한 계단을 올랐다
가렵고 가엽고 누추한 복도들만 들러붙던 꿈자리
심장 근처의 거머리들이 빛과 추위를 구분 없이 빨아들이는 동안
젖을 물리던 곰팡이 자리
이렇게 머리털이 안으로 돋아나는 날씨라면
겨울은 얼마만큼의 낙차를 필요로 하는 걸까
커튼 아래 가려지지 않는 발톱들이
더는 무례하지 않았다

*

눈 녹기 시작한 투광창 아래
주저앉은 방화수통을 열어 보이며
진짜 지하를 보여줄게, 햇살은 막 찢어 넣은 수제비반죽처럼 들끓고

악마는 화분을 뒤집어쓰고 운다


이설빈 시인의 첫 번째 낭송 앨범 I 13월의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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