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꽃밭 I 이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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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꽃밭

 

샛노랑과 새빨강과 진초록과 뒤섞어

가장 탁한 감정을 만들 때

물감놀이의 끝은 아름답지 않다.

 

사인펜으로 색칠공책에 구멍을 내거나

펜 촉이 모조리 자라목처럼 처박히는 건

손끝이 물러서지만

 

꽃들이 춤추는 것을 보고 놀란 적 있다.

국화꽃밭이었나 백일홍군락지였나.

바람도 없는데 살랑살랑 흔들리는 꽃들의 배후엔

진탕을 헤집는 오리가 있었다.

 

가장 선명한 색들을 합해 탁해진 검정은

오리가 주둥이를 처박고 뒤지던 진창 같다.

뚜껑없이 말라 굳은 사인펜 촉은 더 이상 화음이 없고

그걸 또 씹힌 사인펜의 뚜껑의 구멍처럼 바라보자니

오리 발자국의 갈퀴자국은 또 하릴없다.

 

이거 봐 다 말랐지? 뚜껑을 항상 닫자 응.

오리들은 입에 진창을 잔뜩 묻히고 유쾌하다.

뒤뚱뒤뚱 하루가 다 지낼만하다.

발밑 사정이야 그렇다 치고 간질 간질

꽃들이 하늘을 보고 웃는 건 그래서였나?


이현승 시인의 첫 번째 낭송 앨범 I 우울과 몽상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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