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I 박순원

12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나는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없고 배가 고파 누이를 판 적도 없어 아버지는 정권에 빌붙은 적도 저항한 적도 없고 어머니는 평생 전업주부 아버지가 매일우유 장사를 하실 때 나는 방학이 되면 매일 아침 네 시 다섯 시에 가게에 나가 그날 공장에서 도착한 우유를 트럭에서 내려 냉장고에 옮겼지 전문용어로 뗀다고 하지 나는

매일 새벽 그날 우유를 뗐어 국민학교 동창이 상고를 졸업하고 우리 가게에 한 대뿐인 일 톤 트럭 기사를 하고 있었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데 그 친구는 단번에 순원아 내 이름을 불러 주더라고 배달이 끝나면 그 친구와 트럭을 끌고 청주 시내 변두리를 쌩쌩 달렸지 내가 운전면허를 딸 때 그 친구 도움이 결정적이었지 그땐 1종 보통 운전면허만 있어도 기술자였으니까

아버지는 정권에 빌붙을 수도 저항할 수도 없었지 우유는 매일 들어오고 가끔 상한 우유가 나오면 무조건 잘못했다고 보상해 주고 트럭을 몰던 그 친구는 방위로 가고 나는 군대로 가고 그 친구는 보안대 방위가 되어 내가 휴가 나왔을 때 너만 알고 있어 하고 골때리는 얘기 몇 개를 해 줬지 제대 앞두고 마지막 회식 때 자리를 옮기다가 층계에서 거꾸로 넘어져

머리를 다치고 뇌사 어머니는 아들 친구라고 면회 가서 의식도 없는 놈 따끈따끈한 손을 잡고 울고불고 나는 나중에 제대해서 소식을 들었지 나중에 한참 나중에 그 친구가 살아났어 그 친구 엄마도 보통이 아니었거든

죽은 것 같은 아들 발바닥을 바늘로 계속 찔러 꿈틀거리게 해서 살려 냈다는 거야 우리 집에 수너나 수너나 부르면서 발을 조금씩조금씩 끌면서 들어오는데 어머니가 깜짝 놀라 뛰어나가서 마루 끝에 앉혀 놓고 떠듬떠듬 얘기도 들어주고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돈도 주고

몇 번을 왔었다는데 나를 보러 왔다고 나 보고 싶다고 우물거렸다는데 나는 한 번도 못 만났어 물론 우리 어머니는 전업주부 나는 대학생이었지 그 친구 엄마 전업주부 엄마가 그렇게 눈물로 애지중지했는데 얼마 있다가 그 친구 진짜 죽었어 이번엔 교통사고 나는 그때 서울에 있었지 다른 일로 바쁘고 상처받고 있었지

아버지는 여전히 정권에 빌붙지도 못 하고 저항도 못 하고 나는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없이 친구 얘기나 팔아 이게 시가 될까 어쩔까 더듬더듬 쓰고 있지 여태 정권에 빌붙지도 못 하고 저항도 못 하고


박순원 시인의 첫 번째 낭송 앨범 I 따라서 별빛이 다다르고

Leave a comment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