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I 이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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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약속 장소로 나갔습니다 오 분 전에 도착했어요. 기다려도 오지 않았습니다. 오지 않는 사람아 사람이여… 아이스크림은 녹고 손등은 눅눅해졌어요. 계단 밑으로 담벼락 너머로 기어오는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 기다렸습니다. 꼿꼿하게 서서 전단지를 훑어봤어요. 여기에 내 삶이, 내 사람이, 종이는 미끌거리고 색은 바랬습니다. 자꾸 내가 태어나 구두 밑으로 바지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곳은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되물었어요. 나는 명명백백하게 큰 목소리로 대답할 수 있었는데… 입술은 내가 틀렸다고 꺼지라고 했습니다. 슬그머니 나무 밑으로 갔어요. 수렁 같은 밤이었으나 내 마음은 아직 환했어요. 오지 않는 사람아 사람이여… 땅위로 솟아오른 뿌리를 꼭꼭 밟아주었습니다. 오줌이 마려웠어요. 끝까지 참았습니다. 미지근한 내가 흘러내렸지요. 약속 장소에 약속 시간의 나는 온도를 갖고 점점 희망에 차서 발이 생기고 손톱이 자라고 무엇보다 기뻤습니다만, 네가 틀렸다고 그만 돌아가라는 눈빛이 하늘 가득 번졌어요. 괜찮다고 말해 줄 사람아 사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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