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5 I 이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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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5

 

화끈하게 간통을 하고 나니 비로소 세계가 보였다
절망의 잔주름, 희망의 검버섯이 보였다
흙의 미세한 입자, 허공의 숨구멍, 고통의 땀구멍이 보였다
아득히 결핍에 기대어 선 나무들, 겨드랑이에 슬쩍 감추어둔 바람
이파리의 뒷면에 정교하게 얽혀 있는 실핏줄
그것들이 팔 아프게 들고 있는 이파리의 푸른 살, 그래
잔등에 산맥 하나씩 짊어진 잎새들, 저문 길
터벅 걸어 까마득 집 찾아가는 것들, 가까스로
제 집 찾아 울먹울먹 서 있는 막다른 철대문
구더기 쇠파리 끌어안고 하염없이 썩어가는 쓰레기통

푸른 안개에 싸여 거대한 문이 고요히 열리는구나
문 저편에서 안개에 싸인 것들이 하나씩 옷 벗고 있구나
눈부셔라, 저 뽀얀 몸
(세계의 주인은 나의 情夫였구나)

네 이년! 내 속에서 오백 년째 가부좌를 틀고 있는 상투 튼 녀석이
시도 때도 없이 머리끄덩이를 들고 밤하늘로 동댕이쳤다
나는 밤마다 달빛을 타고 흘러다녔다, 내 머리채가 하늘을 덮었다
머리칼 사이로 출렁이는 세상, 그 속에서
꽝꽝 닫힌 집들의 문을 하나씩 열고 있는 그가 보였다
밤새도록


이경림 시인의 첫 번째 낭송 앨범 I 일요일은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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