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아, 내 고양이였던 I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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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아, 내 고양이였던

 

나는 네가 어디서 오는지 몰랐지
항상 홀연히
너는 나타났지
주위에 아무도 없는 시간
그 무엇도 누구의 것이 아닌 시간
셋집 옥상 위를 서성이면
내 마음속에서인 듯
달 언저리에서 인 듯
반 토막 작은 울음소리와 함께
네가 나타났지

너는 오직 나를 위해서인 듯 밥을 먹었지
네 밥은 사기그릇에서 방울 소리를 냈지
그리고 너는 물을 조금 핥았지
오직 나를 위해서인 듯
너는 모래상자를 사용했지
너를 붙잡아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지
너는 작은 토막 울음소리를 내며
순식간 몸을 감췄지
숨바꼭질을 하며 졸음은 쏟아지고
잠은 오지 않았지

그건 동트기 전이었지
우연히 나는 보았지
두 지붕 너머 긴 담장 위로
고단한 밤처럼 네가 걷는 것을
그 담장에는 접근 금지 경고판이 붙어 있지
너는 잠깐 멈춰
내 쪽을 흘깃 보았지
잠깐 비칠거리는 듯도 보였지
너는 너무도 고적해 보였지
오, 그러나 기하학을 구현하는 내 고양이의 몸이여
마저 사뿐히 직선을 긋고
담장이 꺾이는 곳에서
너는 순식간 소실됐지
그 순간 사방에서 매미들이 울어댔지
그 순간 날이 환해졌지
그 순간 눈물이 솟구쳤지
너는 넘어가버렸지
나를 초대할 수 없는 곳
머나먼 거기서 너는 오는 거지
너는 너무도 고적해 보였지
나는 너무도 고적했지.


황인숙 시인의 첫 번째 낭송 앨범 I 너는 너무도 고적해 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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