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겹의 창 I 이설빈

두 겹의 창

 

한 겹의 눈부심을 겨누며 우리는 나아간다 내가 드리워진 이곳이 어느 자오선에 걸쳐 있는지 어느 예리한 시간이 첨탑 끝에 째깍이며 우리 배다른 절망들을 손에 쥔 사과처럼 끊이지 않게 돌려 깎는지, 알 수 없으나 나는 비춰볼 수 있다 그때 태양은 태양이 비추는 칼날보다 깊이가 없었다 무성한 나뭇가지를 꿰뚫는 밝고 가느다란 몇 개의 통로들 뒤에서 더 짙고 억세지는 그늘처럼, 눈 감으면 내 고여 있는 시간들에 꽂히는 작은 파열음들 회환은 너무 가까운 웅덩이에서 텀벙거리고 용서는 굶주린 먹구름처럼 다 해진 바짓단 끌며 우리를 배웅한다

 

다시 한 겹의 어두움을 당기며 우리는 나아간다 커다란 그림자 아래로 위문 온 작은 그늘처럼, 네가 말했다 함부로 나 고개 들지 못하겠어 소리 없이 명멸하는 저 빛 깊숙이 아프게 꽂힐까봐, 너는 말없이 불빛 가까이 다가갔다 빛에 매몰되듯이 내가 너의 마지막 신비가 될 때까지 너는 입김을 불어 빛의 모서리를 접는다 두 눈의 검은 창살을 두고 시작되는 면회, 다시는 꺼내지 마 창문마다 선명한 테이프 자국으로 나에게, 깨지지 마 그리고 제발 깨지 마

 

지금 축축한 주머니 속, 구겨진 손바닥을 꺼내보면 반짝 돌아보며 사라지는 골목 저편의 미소들 흑백의 가로등 아래, 곧 떨어져나갈 탯줄처럼 시퍼렇게 질린 입술에서 나는 나를 도려낸 절망이 제 허기를 비추는 흰소리를 듣는다, 벗어날 수 없는 길은 언제나 같은 입술 다른 목소리들로 말을 걸어오지 우리는 남들이 되비추는 대로 네 자신이 될 수도 있었어 하지만 이제 너는 빈 열쇠고리에 불과해

 

나는 누굴 열고 들어선 걸까? 지금 내 뒤의 너는 너에게만 없는데, 눈 감아도 여전히 같은 눈빛의 궤도를 돌고 있다 고개를 들면


이설빈 시인의 첫 번째 낭송 앨범 I 13월의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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